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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

by 포도당님 2022. 5. 26.

치코테는 하마의 가죽으로 만든 질긴 채찍이다. 20세기 초에는 아프리카를 여행하는 유럽인들에게 필수품이었다. 치코테가 가장 유행한 곳은 벨기에다. 당시 벨기에를 다스리던 레오폴트 2세는 노예무역을 철폐하고, 자국의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푸는 성군이었다. 하지만 벨기에의 식민지 콩고에서 그는 치코테를 든 폭군이었다. 그는 콩고의 고무와 다이아몬드, 상아를 약탈해 원주민을 채찍으로 다스렸다. 저항하는 부족은 몰살시켰다. 악덕과 미덕의 양면성은 비단 레오폴트 2세만의 문제는 아니다. 개척정식의 상징이면서 남미의 침략자인 콜럼버스, 한국전쟁의 영웅이자 독립군의 적인 백선엽 등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는 혼란스럽다. 하지만 역사에 대한 평가가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한 주춧돌이라면, 이런 혼란을 넘어설 수 있는 입장과 기준은 필수적이다.

 역사적 인물의 당대의 타자였던 사람들의 시선으로 바라봐야 한다. 제국주의 시대에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아시를 지배한 이들은 유럽의 시각으로 보면 개척자다. 하지만 원주민의 시각으로 보면 그들은 고유의 문명과 정체성, 생명을 앗아간 침략자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시선을 희생자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비로소 당대의 폭력과 모순이 무엇인지 밝혀진다. 희생자의 시선이 보편성을 지닐 때 우리는 역사의 문제를 밝힐 수 있다. 그리고 그 문제를 극복해나가고 다시 되풀이 하지 않을 힘과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보편화된 타자의 시선 속에서만 가해자와 피해자, 침략자와 원주민의 화해가 가능해진다. 가해자의 시선으로만 이뤄진 역사적 평가는 희생자에 대한 사과 대신 폄하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자의 시선을 따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안중군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과 알 카에다의 9.11 테러는 역사적 타자의 행위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하지만 이들의 행위가 당대의 구조적 폭력을 해소하기 위한 일이었냐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다. 안중군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은 테러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일본의 식민지배라는 구조적 폭력을 해소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일본이 조선의 독립을 인정한다면 식민지배라는 구조적 폭력은 해소되고 평화로운 상태를 이룰 수 있다.

  하지만 9.11 테러는 다르다. 이슬람은 분명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게 질서 속에서 타자라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이슬람 근본주의는 상대의 점멸을 목표로 한다. 구조적 폭력을 해소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둘 중 하나가 사라질 때까지 폭력은 더 큰 폭력을 낳는다. 이처럼 타자의 행위라도 그것이 폭력을 해소하는 방향성을 지니냐, 그렇지 않느냐는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에 있어 중요한 기준이 돼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안중근과 오사마 빈 라덴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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